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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물렀거라’ 딸들이 나가신다

 
◆ 딸들의 시대 ◆

장면 1. A그룹은 그룹 회장 2세인 남매 사이가 '냉랭'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둘은 심지어 공적인 자리에서도 서로 대화를 섞는 법이 없다.
누나인 B씨가 "남동생이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룹 핵심계열사를 그대로 물려받는 건 말도 안된다"며 자신의 몫을 더 요구하고 나선 때문이다.
B씨는 "경영능력으로 평가해달라"며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딸에게 계열사 하나를 맡기고 계열분리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그나마 사태가 이쯤에서 정리된 건 A그룹 회장의 딸에 대한 단호한 태도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B씨가 워낙 이런저런 사고를 친 탓에 아버지가 딸을 더 이상 감싸고 돌 수 없는 지경이라는 후문이다.


 
장면 2. 부모님과 함께 사는 C그룹 D회장. 한때 D회장이 부모에게 반기를 들고 무려 한 달간 집을 나갔다는 풍문이 돈 적이 있다.
어머니가 누나의 경영 참여를 반대하는 D회장을 무시하고 누나에게 주요 보직을 맡겨서라는 배경설명이 붙었다. 어머니의 누나에 대한 강력한 지지 의사를 꺾지 못한 D회장은 결국 누나를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누나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계열사 몇 개를 분리해 나가기 위해 지금도 불철주야 뛰고 있다.


 
장면 3. E그룹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딸 F씨는 요즘 속이 편치 않다. 결혼 문제로 부모님과 심하게 다툰 이후 자신의 입지가 크게 좁아지고 있음을 부쩍 느낀 탓이다. 결국 F씨의 결혼은 불발됐고 F씨는 평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룹 내에서는 이제 F씨가 아닌, F씨 남동생에게 힘이 더욱 실리는 분위기다. 그룹 관계자들은 아직 어려 경영일선에 나서지 못한 F씨 남동생이 추후 새로운 그룹 후계자로 등장하리라 예상한다.

 
'딸'들이 달라졌다. 정확하게는 '지분 물려받아 배당이나 받고, 혹여 운 좋게 계열사 하나 떼어받으면 금상첨화'라던 재계 딸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정정당당하게 능력으로 평가받겠다' '능력이 닿는 만큼 기업을 경영하고, 자신의 역할만큼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식이다.

이처럼 딸들의 권리 주장 목소리가 커진 것은 딸을 바라보는 사회 시선이 달라졌고, 또 딸들의 능력이 먹히는 시대가 된 때문이다. 더불어 재계 오너일가라는 특성 아래서는 선천적으로 아들보다 딸이 더 자기 실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딸이 더 커 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능력만 있으면 딸도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인식이 대세다. 이제 딸이 그룹 대표주자로 떠올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아들이 없으면 사위'라는 공식 또한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심지어 능력 있는 딸이 경영에 관심이 없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아들을 대신해 그룹을 책임지기도 한다.

딸들의 능력이 먹히는 시대가 됐다는 건 보다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여성적인 리더십이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심리학 저서로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김정운 명지대 교수는 "여성은 자라면서 자연스레 의사소통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남자, 특히 재벌가 남자는 권력 관계에 예민하도록 훈련된다. 권력 관계에 예민해지고 길들여진 남성은 절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없다. 그런데 현재 시대는 권력관계에 예민한 지도자보다 의사소통에 원활한 지도자를 원한다. 여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재계에서 아들보다 딸이 커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심리학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된 내용이다.

"오너 아들은 철저하게 아버지 오너십 그늘에 가려 본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다. 이 경우 길은 두 가지다. 심리적으로 위축돼 아무것도 못하거나, 과도하게 아버지와 경쟁하려는 것이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딸은 이런 데서 완전히 자유롭다. 아들이 잘하면 '아버지만큼 하네'라는 평이 전부다. 반면 못하면 부정적인 반응이 바로 날아온다. 부담되고 작아질 수밖에 없다. 딸은 못 해도 다들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좀 잘하면 '생각보다 잘하네'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딸은 다음엔 더 열심히 한다. 아들은 악순환, 딸은 선순환 구조가 되는 셈"이라는 게 김정운 교수 분석이다.

'심리학이 서른살에게 묻다'의 저자 김혜남 정신분석연구소 소장은 "아들이 첫째고, 둘째가 딸일 때는 더하다"고 덧붙인다.

"아무래도 부모 간섭을 많이 받는 첫째는 소심해지면서 샐러리맨이나 공무원이 딱 맞는 성격이 되기 십상이다. 보다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둘째는 사업가 기질이 강하다. 게다가 오빠를 둔 둘째딸은 왈가닥이면서 아버지와 유독 친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오빠를 보고 자라 왈가닥이고, 아들 다음에 딸을 본 아버지는 딸에게 푹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 왈가닥 딸들이 볼 때 소심한 오빠가 가업을 물려받는 것은 말도 안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자신에게 약한 아버지를 졸라 최대한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한다."

딸은 조금만 잘해도 '긍정적 평가'

김혜남 소장은 "그러나 이는 딸 생각에 장자나 아들이 자기보다 나을 게 없거나 심지어 못하다고 생각될 때 해당되는 얘기"라고 부연한다. "물려받는 이가 이론의 여지없이 거대하고 똑똑하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 우산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한 듯 지난 연말 인사에서 딸들이 대거 승진하고 영역을 넓히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둘째딸인 이서현 제일기획 전무(제일모직 전무 겸임)를 필두로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 등이 줄줄이 승진했다. 정지이 현대U & I 전무와 이부진 에버랜드 전무는 이들보다 앞서 각각 2007년 말과 2009년 초에 이미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가 하면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는 칼호텔네트워크 대표라는 새로운 직함을 또 하나 얻었고, 김은선 보령그룹 회장은 아버지 뒤를 이어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경영능력으로 아들과 승부하는 딸'이 가장 많은 곳은 단연 삼성家다. 삼성家의 뿌리는 유교다. 재벌가 중에서도 가장 가부장적인 집 중 하나로 꼽힌다. 아침밥상에 전 가족이 정장을 입고 모여 식사하는 것은 기본. 여성들이 한 상에서 밥을 먹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러나 유독 일에서만은 남녀라는 성별보다는 능력을 우선시해왔다. 이병철 창업주는 장녀(이인희)와 5녀(이명희)에게 각각 한솔그룹과 신세계그룹을 떼어줬다. 그런 전통이 있어서인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뛰는 딸들 선두에 삼성家 여인들 이름이 대거 올라 있다. 이부진 에버랜드 전무, 이서현 제일기획 전무,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이 모두 그렇다.

사실 이 같은 재계 딸들의 약진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메가트렌드로 자리 잡은 '여초현상'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다. 모든 가업은 아들, 그중에서도 특히 큰아들에게 이어졌다. 아들이 능력이 있느냐, 아니냐는 2차 문제다. 때문에 아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회사가 성장을 못하고 정체하거나 아예 망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딸, 아들을 넘어 경영능력이 있는 2세에게 물려주는 게 맞다'는 데 동그라미를 치는 여성이 대다수인 것은, 이들의 약진이 재계의 유리천장을 깨뜨릴 단초가 될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한편 딸들의 약진이 트렌드가 되고는 있지만 이들이 맡고 있는 업종이 여전히 유통, 광고, 호텔, 서비스, 디자인 등 전통적인 여성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석유화학 지분 33.2%를 보유하고 있는 이부진 에버랜드 전무의 미래 모습에 재계의 눈이 쏠려 있다.

[김소연 기자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39호(10.01.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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