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퍼붓는 날이었다. 오후 3시쯤 여느 때처럼 공부방을 나와 친구와 집으로 향하던 김민석군(가명?16)은 일산역 앞을 지나다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었다. 공사장 앞 공터 쪽을 들여다보니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학교 선배들이 발가벗고 인간 피라미드를 쌓고 있었다. 충격적이었지만 눈이 마주칠까봐 성급히 자리를 피했다. 졸업식 뒤풀이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동영상 유출로 논란을 빚은 일산 한 중학교 졸업식의 알몸 뒤풀이 현장이었다.
사건 발생 닷새 뒤인 2월17일,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지목돼 일산 경찰서를 찾은 김해성군(가명? 18)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경찰서에 동행한 김군의 어머니는 그날을 기억했다. "아이가 친구 전화를 받고 모교 졸업식 뒤풀이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나중에 일이 커지자 아이가 직접 그날의 사진을 보여줬고 부모는 충격에 빠졌다. "내 자식이지만 잘못했으니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서도 아이가 죽고 싶다고 해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다.
2월17일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오른쪽)이 알몸 뒤풀이로 문제가 된 중학교를 방문해 간담회를 가졌다. |
동영상 유출 후 반응은 분노 일색이다. 동영상 속 피해 학생들과 같은 반이었던 조영지양(가명?17)은 "보다가 눈물이 났다. 매일 보는 친구였는데 저 정도까지 발가벗겨졌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라며 특히 여자 친구들의 노출사진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화가 난 지역 주민 중 한 명은 "그런 애들은 소년원으로 보내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라며 발끈했다. 피해 학생들의 부모는 처벌을 원하고 있다. 특히 여학생의 부모들은 매우 민감하고 분노한 상태라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미숙한 행동 못지않게 이에 대처하는 외부의 시선 역시 미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서는 설 연휴부터 지금까지 '모 중학교 노모(노모자이크) 사진과 동영상을 구한다'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십대들을 향한 우려와 개탄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한쪽에서는 알몸이라는 볼거리에 대중의 관음증이 발동하는 것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사건 발생 6일 만에포털사이트 등에 동영상 삭제 조치를 내렸다.
이들을 아는 교사들은 가해 학생들이 특별한 아이들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ㅂ고등학교 교사는 "항간에서 오해하듯 폭력서클 학생들이 아니라, 공부는 좀 못해도 열심히는 하는 아이들이었다. 말썽을 피우긴 했지만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도망가 PC방에 가거나 지각을 하는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경찰 수사 관계자도 "평범한 아이들이었고, 성적도 좋은 아이부터 안 좋은 아이까지 편차가 다양했다"라고 말했다. 이전부터 금품 갈취가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경찰은 아직 조사 중이라고 했다. "확인된 건 밀가루나 케첩 같은 게 필요하니까 얼마씩 가져오라는 내용 정도였다"라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졸업식 날 옷을 찢는 사건은 올해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문제가 된 중학교 앞 한 문구점 주인은 3년쯤 전부터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남학생이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작년에도 봤다. 이 학교뿐 아니라 인근 학교도 마찬가지다"라고 그는 말했다. 비슷한 시기 동두천에서도 알몸 뒤풀이 사건이 있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청주에서도 도로를 뛰어다니는 졸업생들 때문에 경찰이 곤혹을 치렀다. 포털 사이트에서 '졸업식'이라는 키워드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이번 사건보다 정도는 약해도, 발가벗은 학생들의 사진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올해의 가해자가 지난해에는 피해자"
일탈 청소년이 벌인 특수한 일로 치부하기보다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명박 대통령 또한 "사건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교육문화 차원의 원론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발언 직후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해당 중학교를 방문해 관련 중고등학교 교장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 뒤 나온 조처는 문제가 된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밀어내려는 것이었다. 가해 학생 김군의 어머
니는 요즘 학교로부터 전학을 가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소송이 진행되거나 어떤 결정이 난 것도 아닌데 쓰레기 치우듯 내치려는 게 서럽다. 당장 어디로 갈 수 있겠나"라고 호소했다. 해당 학교들은 현재 대책을 논의 중이라며 구체적인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산의 한 중학교 졸업식이 있던 2월12일 집단으로 알몸 뒤풀이가 행해졌다. |
한국의 십대들을 인터뷰해온 김순천 르포 작가는 "사건 하나만 오려서 보면 가해 학생들이 범죄자지만 이들도 작년엔 피해자 아니었나. 후배 개인이 독립적인 인격체고 한 부모의 소중한 아이라는 훈육의 과정이 삭제되고,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해 아쉽다"라고 말했다. 가해 학생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한 교사는 "질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구제불능으로 몰아감으로써 정말 그렇게 성장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라고 걱정했다.
최창식 교사(전교조 경기지부 고양중등지회장)는 이번 사건에 우리 교육의 현실이 녹아 있다고 분석했다. "졸업이 스승과 친구들 간 석별의 정을 나누거나 아쉬움을 느끼는 자리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탈출?해방으로 여겨진다는 건 학창 시절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번 사건은 정도와 확산 방식 때문에 크게 불거졌지만 어디든 구조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전문가들은 특목고, 자사고 등 입시 위주의 교육환경이 강화되고 제도 자체가 내부적으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졸업식을 계기로 그 분노를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기도 교육청의 '경기도학생인권조례제정자문위원회' 홈페이지에 한 학생이 시 한 편을 올렸다. '학교는 감옥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제목의 글에는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공부란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밑에는 '졸업식 뒤풀이?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뒤풀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님?'이라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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